혼과 풀레인지의 장점을 적극 살린 신세대 스피커 - 이종학

얼마 전, 우연히 아는 선배를 만났다. 편의상 K로 해두자. 학교 선배나 직장 선배는 아니고 필자보다 연배가 위라서 자연스럽게 선배로 부르고 있다. 실제 그는 대단한 오디오파일이어서 상당수의 하이엔드 제품들을 섭렵한 바 있거니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탐닉은 거의 집착 수준에 가깝다. 오로지 음악과 오디오를 위해 태어난 분이 아닐까 가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므로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도 음반이며 음악이며 또 오디오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최근 그는 대단한 전향을 했다. 다시 말해, 솔리드스테이트 & 첨단 스피커 일변도의 편향에서 벗어나, 진공관, 그것도 3극관 위주로 선별해서 혼 타입 스피커와 매칭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스는 아날로그.

“결국 스피커는 혼 아니면 풀레인지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앰프는 진공관, 그것도 3극관이고, 아날로그는 당연한 거지.”

나중에 그의 리스닝 룸을 방문해보니 거대한 혼 스피커와 몇 개의 진공관 앰프는 그렇다 치더라도, 공간을 가득 메운 LP 컬렉션에 질리고 말았다. 한 2만장은 가볍게 넘을 것 같았다. 세상에 이거 언제 다 들으려고 모았냐 혀를 끌끌 찼는데, 그 와중에도 K 선배는 새로 구입한 음반을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이쯤 되면 병이다. 천형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한 소리 했지만, 속으로는 이런 조합에서 나오는 맑고 싱싱한 음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번에 소개할 스피커를 수입한 K 사장 역시 필자와는 구면이다. 첫 대면은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행사장에서 이뤄졌다. 우연히 한국에서 온 오디오 회사의 부스에 앉아 있다가 그와 대면한 것이다. 잠깐 자신을 소개한 뒤, 계속 오디오 이야기가 이어졌다. 특히 케이블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는데,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황한 설명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결국 3일 내내 이 부스에서 K 사장과 대면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중에 그가 수입한 케이블이 PSC 임을 알았고 필자 역시 리뷰를 통해 이 제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저가의 제품에서도 탁월한 성능을 발휘해,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많은 애호가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K 사장이란 사람, 약간은 기인 기질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러 개의 룸에 각각 최첨단 하이엔드 오디오 세트로 장식해서 소장한 제품의 양이 거의 웬만한 숍을 방불케 한다고 한다. 스피커만 해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제품이 즐비하고, 앰프나 소스에 관해선 두 말할 필요가 있다. 누군 평생에 걸쳐 마련할 만한 시스템을 여러 개나 운용하고 있다니, 전술한 K 선배 못지않은 환자인 것이다. 누구든 만나면 오디오 이야기부터 또 오디오 이야기만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요즘 그 제품들이 하나 둘씩 그의 룸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절대 돈이 딸려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음에 대한 생각이나 철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대면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결국 혼 타입이나 풀레인지 스피커에 3극관 싱글 앰프가 아닐까요? 다른 선배들처럼 웨스턴 일렉트릭도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가히 충격적인 발언이다. 꼭 웨스턴이 아니라도 좋다. 아날로그를 운용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3극관 & 혼 타입(또는 풀레인지)의 조합에 어쩔 수 없이 다다르게 되는 일부 고수들의 행보에 있다.

물론 필자는 위의 조합이 최고의 소리를 선사하는 오디오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조합이 가진 매력은 다른 조합에서 느낄 수 없는 종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필연적인 결론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K 사장으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오디오 시스템을 처분하고 음에 대한 사고를 바꾸게 하는 제품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번에 소개할 WHT의 PR1이다. 이른바 레퍼런스 풀 레인지 스피커로 불리는 시스템이다.

이 스피커를 소개하기 전에, PSC의 창업자에 대해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K 사장의 오디오관을 통째로 뒤바꾼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디오계에 고수가 많기는 하지만, 이 분 역시 그 리스트에 충분히 올려도 될 만한 인물이라 여겨진다.

마크 모즈가와(Mark Mozgawa)라는 이름의 이 사람은 원래 뮤지션이었다. 록 밴드의 리더였던 듯 많은 공연을 다니며 숱한 현장음을 체험했다. 이러면서 고급 PA 제품을 제작하고, 스튜디오용 모니터를 만드는 등 연주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오디오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갔는데, 그 결과물이 PSC 케이블이다. WHT는 별도로 설립한 회사인데, 스피커를 전문으로 만드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마크가 혼 타입 스피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경험 때문이다. 70년대에 뮤지션으로 한참 활동할 때, PA 장비가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혼 타입 스피커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매우 근사했다. 일반적인 덕트형 스피커에서 느낄 수 없는 빠르고 명료한 음에 가능성을 발견, 직접 스피커 제작에 관여하게 된다.

그 결과 1980년에 최초의 모델을 개발했으며, 이를 직접 PA에 투입하자 멤버 모두 놀랐다고 한다. 특히 드러머와 베이스 주자는 풍부한 저역에 매료되어 무대에 오를 때 더욱 활기를 띤 연주를 들려줬다.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는 계속 스피커를 개선했는데, 1994년에 이르면 베이스 리플렉티드 혼 모양의 다자인을 완성하게 되었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PA용이므로, 하이파이와는 좀 세계가 다르다. PA는 대음량 재생을 목표로 폭넓은 방사를 이뤄야 하지만, 작은 공간에서 듣는 하이파이는 번지수가 틀리다. PA용 유닛을 사용하면 마냥 거칠고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결국 그는 직접 드라이버를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생각하는 혼 타입 스피커의 장점은 무엇보다 고능률에 있다. 예를 들어 94dB와 87dB의 능률을 가진 스피커를 비교한다고 하자. 전자는 후자가 전혀 반응도 하지 않을 신호에도 반응을 한다. 강한 신호가 입력될 때에도 결과는 비슷하다. 즉, 고능률 스피커의 장점은 단순히 작은 신호를 잘 내는 것뿐 아니라, 소리를 더욱 풍부하고 정학하게 낸다는 것이다. 일례로, 중간 정도 세기의 신호가 87dB의 스피커에 의해 재생되어 3가지 정도의 강약이 나온다면, 94dB는 8개의 강약을 표현한다. 만일 97dB라면 더욱 풍부하게 재생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간 혼 스피커의 개발이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빈티지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요구하는 음질에 미달하는 제품이 많다. 굉장히 시끄럽거나 과장되거나 착색이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755나 757 등을 좋게 들은 바 있고 A5도 황홀한 음을 내는 경우를 봤는데, 이런 경험을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다행히 그간 드라이버의 개발이 많이 이뤄져 리본 트위터로 혼 트위터의 장점을 계승할 단계가 되었다. 심지어 리본으로 미드 레인지도 커버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 대목의 성과는 눈부실 지경이다. 본기엔 파운텍 디자인(Fountek Design)에서 만든 제품을 투입하고 있다.

그럼 문제는 중저역인데, 여기서 마크가 생각하는 개량된 폴디드 혼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물론 드라이버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위해, 그는 자체 개발한 8인치짜리 풀레인지 천연 가죽 드라이버를 완성했다. 일일이 공심 코일을 감고 멤브레인을 연결해서 수공업 방식으로 생산한 것이다.

인클로저의 경우, 발주는 독일에 하지만, 최종 마무리는 CNC 머신으로 미세 조정해서 직접 행한다. 단, CNC 머신은 대규모 물량만 취급하기 때문에, 공장이 쉬거나 혹은 일이 없을 때 직접 차를 몰고 가서 하나씩 처리 과정을 검사하며 마무리 짓는다고 한다.

또 그림에서 보면 알겠지만, PR1은 아랫부분의 혼 개구부가 상당히 크다. 잘못 만들어지면, 혼 특유의 시끄러움이나 거친 음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공진을 제어하기 위해, 인클로저 사이사이에 교묘하게 납을 넣어 튜닝했다. 아마 이 과정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중저역의 유닛을 보면, 한가운데에 페이즈 플러그가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가 알아봤더니, 이것이 일종의 기계적인 크로스오버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본기엔 네트워크가 없으므로, 중저역 유닛의 높은 주파수 커팅을 이런 페이즈 플러그 장치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리본 트위터는 낮은 주파수 커팅을 문도르프의 실버 커패시터로 해결하고 있다.

그럼 뒷부분을 보자. 그렇다. 바이와이어링 터미널이 구비되어 있다. 즉, 리본과 중저역 유닛에 따로 파워가 공급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오디오라는 것이, 하나의 장벽을 극복할수록 막이 벗겨지는 법이라, 이렇게 네트워크를 생략할 경우 얻어지는 이점에 대해선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즉, 본기는 풀 레인지와 혼 타입 스피커의 장점을 모두 수용한 케이스인 것이다.

한편 내부 배선의 경우, PSC의 6N 순은선인 커스텀이 사용되었는데, 이 선만 미화로 4천불이나 하는 고가의 케이블이다. 바인딩포스트 역시 열처리된 6N 순은선을 사용한다. 그럼 드라이버에 사용하는 보이스 코일은 어떤가? 언뜻 6N 순은선이 연상되지만, 그럴 경우 은의 무게로 인해 고능률을 얻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은도금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그럼 문제는 소리인데, 필자의 인상은 매우 밸런스가 좋고 상쾌하며 다이내믹 레인지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네트워크를 거치지 않은 데다가 28Hz~40kHz를 아우르는 폭넓은 주파수 대역, 95dB라는 고능률 등이 합해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사이즈도 우리 주거 환경에 어울릴 만큼 적당해서, 이런 타입의 스피커를 써보고 싶어한 분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본격 시청 리포트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시청엔 다질 앰프 세트에 코드의 레드 레퍼런스 CDP를 동원했다. 이어서 두 번째 시청엔 멜로디의 SP7에 역시 레드 레퍼런스 CDP를 물렸다. 시청에 쓴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림스키-코르사코프 "세헤라자데" 프리츠 라이너

-모차르트 "Sonata for Piano & violin No. 26" 하스킬(p) & 그뤼미오(vl)

-Jimi Hendrix "All Along the Watch Tower"

-Sonny Rollins "St. Thomas"


우선 다질 세트로 들어보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다양한 음향 효과가 매우 두드러진다. 무섭게 분노한 술탄의 노여움이나 이국적인 정취로 다가오는 세헤라자데의 속삭임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악기군의 다채로움은 현란하기만 하다. 작곡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곡을 썼는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재생이다.

이어서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음색에서 다질 특유의 미음이 듬뿍 나온다. 하스킬의 피아노 연주도 매우 낭랑해서 50여 년 전의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싱싱하고 활기차다. 기본적으로 풀레인지인 만큼 다질의 개성이 강하게 우러나와 이 앰프의 장점을 십분 살려주고 있다.

지미 헨드릭스는 다소 과격한 표현이 제격인데, 여기서는 약간 점잖다. 그러나 흠이 될 정도는 아니다. 박력 넘치는 기타에 도전적인 보컬이 어우러진 일대 명연인데, 중간 중간에 삽입된 음향 이펙트가 적절하게 활기를 심어 준다.

롤린스는 다소 남성적인 맛이 있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약간 온화하다. 청년이 아닌 중년의 신사가 부는 듯하다. 이런 재생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 녹음 공간의 사이즈나 음향 조건이 낱낱이 드러날 만큼 입체적인 홀 톤의 재현이 인상적이다.

앰프를 이번에는 멜로디로 바꿨다. 다질에 비하면 엄청난 다운그레이드지만, 이 작은 진공관 인티 앰프와 조합되었을 때의 음도 매력이 넘친다. 그래서 오디오가 재미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이국적인 음향이나, 모차르트의 온화함, 지미의 야성, 롤린스의 남성미가 뚜렷이 제 개성을 갖고 다가온다. 과연 이런 형태의 스피커는 진공관이 약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케 하는 좋은 매칭이다.

이렇게 멋진 결과가 나오자, 참 이 스피커 자체의 가격은 만만치 않지만, 매칭되는 앰프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리 비싸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론 진공관 앰프도 분리형에 각인관에 뭐에 하면 눈덩이 불어나듯 비싸지는데, 일단 인티 정도로 시작해도 부담이 없다. 세상에는 이런 저렴한 제품들이 너무도 많아, 멜로디, 에어 타이트, 케언, 유니슨 리서치 등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 심지어 두어 종의 인티를 준비해서 기분에 따라 바꿔들어도 별로 부담이 없을 정도다.

본기는 제조 과정에서 일체의 타협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만들어졌고 더구나 고능률이어서 소출력 진공관으로 얼마든지 울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특히 혼이나 풀레인지 하면 그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어딘지 고색창연하고 빈티지 취향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 분들이라면 이렇게 놀랍도록 개선된 본기의 음에 한 번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고역 유닛: 4.3 인치
중저역 유닛: 8 인치
Crossover Frequency: 1700hz
Frequency Response: 28-40k, +/-3,
Impedance: 10/8 옴

권장파워: 5-150 와트
입력감도: 95 dB

크기: 109cm 28cm 35cm
무게: 42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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